낮에는 계란을 팔고, 밤에는 시체를 치운다. 2020년 개봉한 영화 〈소리도 없이〉가 보여주는 두 남자의 일상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성실하게 산다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과 같은 말일까요.
성실함의 역설: 열심히 하면 다 괜찮을까
영화 속 태인과 창복은 게으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고, 정해진 루틴대로 움직이며, 감정 낭비 없이 하루를 소화합니다. 문제는 그 일의 내용이 범죄조직의 뒷수습이라는 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는 개념을 건드립니다. 도덕적 해이란 자신의 행동이 초래하는 결과에 대한 책임감이 약해지면서 윤리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경제학에서 출발한 개념이지만, 일상의 선택에서도 충분히 적용됩니다.
저도 비슷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직장에 다닐 때, 어떤 결정이 분명히 누군가에게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내 담당이 아니니까"라는 이유로 넘긴 순간이 있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 그때는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돌아보면 그냥 불편함을 회피한 것이었습니다. 태인과 창복의 삶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성실하게 일한다"는 태도는 그 자체로 가치 있습니다. 하지만 성실함은 방향이 없으면 그냥 관성(inertia)이 됩니다. 관성이란 외부의 변화 없이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힘을 말하는데, 잘못된 일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 자체가 무뎌지고, 그냥 하던 대로 하게 됩니다. 영화는 이 무뎌짐이 어떻게 사람을 조용히 바꾸는지를 꽤 정확하게 포착합니다.
이 부분에서 의견이 갈립니다. "그들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냐"고 보는 시각도 분명히 있습니다. 저도 그 논리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생계라는 이유가 모든 선택을 면죄하는 만능 카드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윤리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도덕적 해이: 익숙해진다는 것의 무서움
〈소리도 없이〉에서 가장 불편하게 봤던 장면은 폭력적인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태인이 아이 초희와 밥을 먹고, 별말 없이 일상을 이어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평온함이 더 무거웠습니다. 범죄심리학에서는 이를 둔감화(desensitization)라고 부릅니다. 반복적인 자극이나 경험에 의해 특정 상황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약해지는 현상입니다. 쉽게 말해, 처음엔 충격적이었던 일이 시간이 지나면 그냥 일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범죄 현장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직장에서의 부당한 관행에 점점 무뎌지거나, 반복되는 불공정함을 "원래 그런 거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 경계가 생각보다 훨씬 가깝다는 걸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불편함이었던 것들이 어느 시점부터는 아예 인식조차 되지 않게 됩니다.
영화에서 태인과 창복이 처음부터 악인이었던 것은 아닐 겁니다. 그들도 어느 지점에서 선택을 했을 테고, 그 선택이 쌓이면서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한국영상자료원(KMDb)에서도 이 작품을 소개하며, 두 인물이 범죄조직의 하청을 받아 살아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 "예상치 못한 상황"이 결국 유괴범이라는 자리인데, 그 자리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이런 둔감화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처음에는 '이건 아닌데'라는 감각이 남아 있다. 불편함이 있고, 자기 합리화가 필요하다.
- 반복이 쌓이면 합리화도 필요 없어진다. 그냥 하게 된다. 불편함 자체가 줄어든다.
- 이 단계에 이르면, 외부에서 문제를 지적해도 처음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이미 기준점 자체가 이동해 있기 때문이다.
- 결국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인식하는 능력이 약해진다. 태인이 말이 없는 것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이 구조를 보면서 저는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정리하기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영화가 의도한 것이 바로 그 불편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침묵의 공모: 말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태인은 이 영화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과묵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침묵이 다르게 읽혔습니다. 침묵의 공모(complicity through silenc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잘못된 상황을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 상황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거나 가담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법학이나 윤리학에서 자주 논의되는 개념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행동이라는 시각입니다.
저도 그 감각을 압니다. 누군가 명백히 잘못된 말을 하는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순간,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 침묵이 동의처럼 기능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당시엔 "괜한 싸움을 만들기 싫었다"거나 "나 혼자 말해봤자"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결국 그 상황을 유지시키는 데 기여한 셈이었습니다.
영화 비평 분야에서는 이런 침묵 구조를 두고 서사적 공백(narrative void)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서사적 공백이란 등장인물이 명시적인 설명 없이 행동함으로써 관객이 그 의미를 스스로 채워넣게 되는 구조입니다. 〈소리도 없이〉는 이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태인의 침묵은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씨네21에서도 이 영화의 후반부 장면 구성이 독특하게 해석될 수 있다고 다룬 바 있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도 책임이 될 수 있다"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모든 침묵을 공모로 볼 수는 없다"는 반론도 충분히 납득 가능합니다. 다만 저는 이 영화가 그 경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를 각자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고 봅니다. 답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질문을 남기는 영화입니다.
〈소리도 없이〉를 보고 나서 한동안 '성실하다'는 말을 쓸 때 한 번씩 멈추게 됩니다. 성실함은 분명 좋은 덕목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성실함인지, 그 방향이 맞는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아주 조용하게 보여줍니다.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 불편함이 어디서 오는지 한번쯤 들여다보시길 권합니다. 그 질문이 오래 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