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오히려 저를 가장 먼저 무너뜨렸습니다. 영화 〈다음 소희〉를 보면서 그 기억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밝고 씩씩한 열여덟 살 소희가 콜센터 현장실습을 나가며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은, 누군가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착한 학생이 가장 먼저 소진되는 이유
소희는 처음부터 약한 아이가 아닙니다. 춤을 좋아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려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저는 그 점이 오히려 소희를 더 위험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임감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먼저 갈아 넣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이라고 부릅니다. 번아웃 증후군이란 과도한 업무나 심리적 압박이 누적되어 신체적·정서적으로 완전히 소진된 상태를 뜻합니다. 중요한 건, 번아웃은 의지가 약한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열심히 한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소희가 딱 그랬습니다.
저도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실수하기 싫고, 인정받고 싶고, 맡은 걸 끝까지 해내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이 나쁜 건 아닌데, 그 마음이 지나치면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고, 힘들다는 말을 삼키게 됩니다. 소희가 걸어간 길이 낯설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 있었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영화가 "나약한 개인"이 아닌 "구조 속에서 소진되는 성실한 사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청춘 영화와 결이 다르다고 봅니다. 무너진 게 소희의 잘못이 아니라, 소희를 그 자리에 세운 어른들과 제도의 문제라는 것을 영화는 끝까지 잊지 않습니다.
성실함의 압박, 그게 왜 위험한가
콜센터라는 공간에서 소희에게 주어지는 것은 배움이 아닙니다. 실적입니다.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감정노동이란 자신의 실제 감정과 무관하게, 직무상 요구되는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 노동 형태를 뜻합니다. 미소를 유지하고, 화가 나도 참고, 고객의 욕설 앞에서도 친절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이게 성인 노동자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데, 소희는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잔인한 건, 소희가 그 압박을 스스로 내면화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아직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닐까"라는 생각. 저도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 장면들이 남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더 잘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현장실습(現場實習)이라는 제도 자체도 짚어야 합니다. 현장실습이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졸업 전 실제 작업 현장에서 직무를 경험하는 교육과정을 말합니다. 이 제도는 원래 학생이 현장을 배우는 게 목적인데, 실제로는 저렴한 노동력을 공급하는 구조로 변질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현장실습 학생의 노동권 보호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습니다.
~라는 의견도 있지만, 실제 사례를 보면 "학교와 기업이 연결된 구조 속에서 학생이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는 점이 더 핵심입니다. 소희도 불만을 말할 어른이 주변에 없었습니다. 학교도, 회사도, 어른들도 각자의 사정으로 그 사실을 외면했습니다.
형사 유진이 따라간 것, 책임의 방향
영화의 후반부는 형사 유진(배두나)의 시선으로 진행됩니다. 유진은 수사관으로서 소희의 사건을 조사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말합니다. 학교 선생님도, 회사 관리자도, 제도를 운영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하고, 동시에 가장 정확한 장면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맞닿습니다. 구조적 폭력이란 특정 개인의 악의 없이도, 사회 제도나 시스템 자체가 누군가를 체계적으로 해치는 상태를 뜻합니다. 소희를 해친 사람은 한 명이 아닙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시스템이 소희를 몰아간 것입니다.
영화 〈다음 소희〉가 제75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 영화가 이 부문 폐막작에 오른 건 처음이었고, 그 배경에는 이 영화가 단순한 사회고발을 넘어 감정과 구조를 동시에 담아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KoBiz도 이를 공식 보도한 바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BIS).
저는 유진이 사건을 파고들수록 점점 지쳐가는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유진도 어떤 의미에서 소희와 같은 압박 속에 있습니다. 혼자서 끝까지 책임지려는 사람이, 결국 고립되는 구조입니다. 이 영화가 묻는 건 소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느낌이 거기서 왔습니다.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 그리고 그 불편함의 가치
〈다음 소희〉를 보고 나서 감정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관객을 울리는 데 집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차갑게, 차분하게 현실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더 오래 머릿속에 남습니다. "감동적인 영화"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불편함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2017년, 실제로 통신사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학생에게 벌어진 일이 이 작품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영화 속 장면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화를 본 뒤 스스로에게 물어봤습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조금만 참아"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 말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무게였을지 생각한 적이 있는가.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다음은 소희이지만, 소희 다음은 또 누가 있는지 이 영화는 끝까지 묻습니다.
〈다음 소희〉를 통해 생각해볼 수 있는 핵심 질문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왜 더 먼저 무너지는가
- 현장실습 제도는 학생을 위한 제도인가, 기업을 위한 제도인가
- 어른들은 "참아라"는 말 대신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 구조적 문제 앞에서 개인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이 질문들에 정답을 내놓는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질문 자체를 피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다음 소희〉는 한 번쯤 마주해야 할 작품입니다.
보기 편한 영화가 아닌 건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보고 나서 느낀 건, 이 불편함이 오히려 오래가는 질문을 남긴다는 점이었습니다. "소희 다음에는 누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 영화는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볍지 않은 영화를 볼 준비가 됐다면, 〈다음 소희〉를 권합니다. 보고 나서 가까운 사람에게 "요즘 어때?"라고 먼저 묻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 참고: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28708 https://www.humanrights.go.kr https://www.kobi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