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성년〉을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부모의 불륜이라는 소재인데도 막장 드라마처럼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집안 분위기가 달라졌을 때 혼자 마음을 졸이던 어릴 적 기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왜 아이들은 어른들의 비밀을 가장 먼저, 가장 혼자서 감당하게 되는 걸까요.
철없는 어른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 이유
솔직히 처음 이 영화를 고른 건 배우들 때문이었습니다. 김윤석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기도 하고, 염정아와 김소진이 함께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됐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제가 주목하게 된 건 어른 배우들이 아니라 두 고등학생, 주리와 윤아였습니다.
영화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같은 학교 2학년인 두 소녀가 옥상에서 만나고, 주리의 아버지 대원과 윤아의 어머니 미희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설정에서 제가 계속 걸린 건 한 가지였습니다. 이 아이들은 왜 이걸 알아야 했을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종종 아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진실을 숨깁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은 말보다 분위기를 먼저 읽습니다. 이걸 심리학에서는 비언어적 신호 감지(nonverbal cue detection)라고 표현합니다. 비언어적 신호란 말이나 글이 아닌, 표정·목소리 톤·침묵·행동 변화 같은 것들을 통해 감정이나 상황을 전달하는 요소를 말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책으로 배운 개념이 아니라 살면서 그냥 몸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아지거나, 방문이 조용히 닫히는 순간이 생기면 이유도 모르면서 괜히 숨을 참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영화 속 주리가 어머니 영주 몰래 상황을 수습하려 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가 어른의 실수를 혼자 처리하려는 그 모습이, 이 영화의 제목이 왜 〈미성년〉인지를 역설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정말 미성숙한 쪽이 어느 편인지 묻는 것 같았습니다.
가족의 비밀이 아이에게 남기는 것들
가족 내에서 비밀이 생기는 순간, 아이가 받는 심리적 충격을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으로 설명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애착 이론이란 아이가 주 양육자와 형성하는 정서적 유대 관계가 이후 삶 전반의 안정감과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입니다. 쉽게 말해,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기준입니다. 그 기준이 흔들리면 아이의 내면 전체가 함께 흔들립니다.
〈미성년〉에서 주리와 윤아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두 소녀는 어른들의 실수에 가담한 것도 아니고, 그 결과를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상처를 받고, 가장 빠르게 현실을 수용해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서도 이 작품은 두 십대 소녀가 부모들의 관계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놓이는 이야기로 소개되고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린 장면들이 있습니다. 주리가 상황을 수습하려다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 과정, 윤아가 이 모든 것에 거리를 두려 하지만 결국 피할 수 없는 감정과 맞닥뜨리는 순간들. 두 사람의 대응 방식은 달랐지만, 둘 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자기가 원해서 알게 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됐을 때 받는 충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부모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갑자기, 준비 없이 알게 되는 인지적 혼란
- 자신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짐이 되는 감정적 고립감
- 모른 척해야 하는지, 말해야 하는지 판단해야 하는 역할 역전(role reversal) 상황 — 역할 역전이란 원래 어른이 맡아야 할 책임을 아이가 떠안게 되는 구조를 뜻합니다
- 비밀을 지키면서 생기는 관계의 균열과 피로감
이 네 가지가 영화 속 두 소녀의 표정과 선택에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감각과 너무 가깝게 겹쳐서 몇 번은 화면을 제대로 못 봤습니다.
아이의 감정을 다루는 영화의 방식
〈미성년〉이 다른 불륜 소재 영화들과 구분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어른들의 잘못을 선정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그 여파를 받는 아이들의 감정선을 조용히 따라간다는 점입니다. 이런 연출 방식을 영화 비평에서는 절제된 리얼리즘(restrained realism)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절제된 리얼리즘이란 극적 장치나 과장 없이 인물의 내면을 현실에 가깝게 담아내는 스타일을 말합니다.
씨네21의 전문가 평에서도 이 영화는 인물 누구에게도 소홀하지 않은 작품으로 평가받았습니다(출처: 씨네21).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어른 인물들조차 단순한 악인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미희는 무너진 가정을 버티며 살아온 사람이고, 대원은 비겁하지만 그 비겁함 뒤에 무언가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어른들의 행동을 용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비판적으로 보면, 이 영화가 어른들의 잘못에 대해 명확한 처벌이나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실제 삶에서도 어른들의 실수가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 불완전한 결말이 현실에 더 가까웠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옆 사람에게 어떤 무게로 전달되는지 아는 일이라는 생각을 이 영화가 계속 하게 만듭니다. 성숙도(maturity)란 단어가 있습니다. 성숙도란 자신의 감정과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책임지는 능력을 뜻합니다. 〈미성년〉에서 그 성숙도가 가장 낮은 쪽은 제목의 의미와 반대로, 어른들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아마 어딘가에서 비슷한 감각을 경험했기 때문일 겁니다. 〈미성년〉은 누군가를 단죄하거나 위로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다만 그 시절 혼자 감당했던 감정이 있다면, 이 영화는 그것을 조용히 꺼내 보여줍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한번쯤 시간을 내어 볼 만한 작품입니다. 보고 나서 잠깐 멍하게 앉아 있을 각오 정도는 하시고요.